[우리들의 블루스] 정은희 – 따뜻함 뒤에 숨겨진 상실의 기억
tvN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는 제주도의 일상과 그 안에 담긴 사람들의 이야기로 큰 공감을 얻은 작품이다. 그 중심 인물 중 하나인 정은희(이정은 분)는 생선 가게를 운영하며 주변 사람을 따뜻하게 챙기는 ‘동네 큰언니’ 같은 인물이다. 하지만 그녀의 따뜻함은 선천적인 성격이기보다는, 수많은 상실을 겪고도 무너지지 않으려는 노력의 결과물에 가깝다.
이 글에서는 정은희라는 인물의 겉과 속, 그리고 그 따뜻함 뒤에 숨겨진 감정의 복합성과 상실의 기억을 심리학적으로 풀어본다.
1. 늘 챙기고 베푸는 사람 – 그 이면의 감정 공백
정은희는 드라마 내내 동네 사람들, 친구들, 고객들에게 늘 베푸는 역할을 자처한다. 사소한 일에도 발 벗고 나서며, 음식 한 그릇이라도 더 챙기고, 먼저 말을 거는 그녀는 ‘마음이 넓은 사람’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런 행동은 자신의 내면 공허함을 외부로 보상하려는 심리적 패턴일 수 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과잉보상(overcompensation)’이라고 부른다. 즉, 내면의 외로움이나 상처를 타인을 도우면서 덜어내려는 방식이다.
정은희의 친절은 진심이지만, 그 진심의 바닥에는 누구보다도 외롭고 허기진 감정이 자리잡고 있다.
2. 과거 친구와의 재회 – 상처받은 기억이 드러난 순간
드라마 중반, 정은희는 학창 시절 친구였던 정현(박지민 분)과 재회한다. 어린 시절 가장 가까웠지만, 어느 순간 단절된 관계. 그 재회의 과정에서 정은희는 차마 표현하지 못했던 감정들을 폭발시키며 억눌렀던 과거의 상처를 마주한다.
이 장면에서 그녀가 보여주는 감정은 단순한 서운함이 아니다. 그것은 버려졌다는 감각(abandonment)과 나만 뒤처졌다는 자존감의 균열이 겹쳐진 복합 감정이다.
그녀는 친구가 서울로 가서 잘 살고 있는 모습을 보며 기뻐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삶을 비교하며 작아지는 자신을 마주한다. 이 감정은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할 것이다. 어느 날 오랜 친구를 만나, 서로의 ‘현재’를 마주하는 순간 느끼는 비교와 상실, 그리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열등감 말이다.
3. 상실을 견디는 사람의 방식 – 소리 내지 않는 울음
정은희는 삶에서 많은 상실을 겪었다. 남편과의 갈등, 가족의 부재, 친구와의 단절, 그리고 사회적 소외.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 어떤 장면에서도 자신의 고통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
그녀는 늘 “괜찮다”고 말하고, 울고 나서도 금세 미소를 짓는다. 이런 모습은 보기엔 단단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이 없었던 사람의 전형적 반응이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감정 억제형 방어기제(suppression-based coping)로 본다. 감정을 누르고 살아온 사람일수록, 그 감정을 꺼내는 순간이 두려워지고, 결국 ‘감정을 잊은 척하며 살아가는 것’이 일상이 된다.
정은희는 누구보다 울고 싶었지만, 그 울음을 책임과 역할로 덮어두고 살아온 사람이다.
4. 누군가의 친구가 되어주는 일 – 자기 회복의 시작
정은희는 결국 친구와의 오랜 오해를 푸는 데 성공한다. 그 과정에서 과거의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나도 서운했지만, 그래도 친구였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
이 장면은 단순한 화해의 순간이 아니다. 정은희 자신이 자기 감정을 인정하고, 그것을 타인과 공유한 최초의 경험이다. 심리적으로 볼 때, 이는 자기 회복(self-recovery)의 신호다.
사람은 감정을 억누르고 살 수 없다. 언젠가는 그 감정을 드러내고, 누군가에게 이해받으며, 나 자신을 다시 받아들이는 과정이 필요하다. 정은희는 그 과정을 늦게 시작했지만, 결국 혼자가 아니어도 된다는 감정을 되찾는다.
마무리 – 따뜻함은 강함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었다
'우리들의 블루스'속 정은희는 보기엔 밝고 활기차지만, 그 이면엔 수많은 외로움이 켜켜이 쌓여 있는 인물이다. 그녀가 친절하고, 베풀고, 웃을 수 있었던 이유는 강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무너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녀를 보며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나는 괜찮다고 말할 때, 정말 괜찮았던 적이 있었나?”
정은희는 살아남기 위해 사람들에게 따뜻해야 했지만, 그 따뜻함을 통해 자기 자신까지 다시 껴안게 된 사람이다. 그래서 그녀의 눈물은, 진짜 회복의 시작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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